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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슬픔’을 감각하기 : 서고운의 그림에 대하여

장파 (작가)

 

화가의 욕망, 믿음의 윤리

나는 종종 화가의 욕망이 무엇인지 다른 ‘화가’에게 묻곤 한다. 모든 화가에게 던지는 물음은 아니다. 질문하게끔 하는 그림이 있다. 예를 들어 2차원의 화면 위에 그려진 회화적 재현 너머 작가의 삶의 궤적이 느껴지는 경험을 할 때이다. 반대로 회화적 표현으로 가득 찼지만, 텅 비어 있는 평평한 화면으로 다가오는 그림에도 해당한다. 그렇다고 ‘화가의 욕망’에 대한 물음이 회화적 조형성에 대한 위계를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근본적인 추동에 대한 물음이다. 말하자면 나는 ‘회화적 본질’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고루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다. 하여 ‘그림을 왜 그리는가?’ 혹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끝도 없이 해 보았지만, ‘아직도 모르겠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다. 심지어 그림의 제 문제를 생각할수록 의혹이 더 깊어지는 상황을 맞닥뜨리곤 한다. 그런데도 그림이라는 매체에 대한 자의식과 본질을 계속 캐묻는 게 ‘화가'의 의미라면 의미일 것이다. 이미 회화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회화의 본질’에 매달리는 것은 화가가 지닐 수밖에 없는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서고운의 작업에서 ‘화가의 욕망’을 떠올린 것은 그녀가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해 제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회화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뇌의 흔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가해진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포착하여 그려내는 것, 즉 ‘재현의 불가능성’을 끝도 없이 고민하며 그것을 그려내는 것이 작가의 윤리일 것이다. 서고운은 재현의 가능이나 불가능을 확인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폭력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에 있어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재현의 윤리를 지켜내기 위해 구도(求道)적 자세를 취한다. 그녀의 그림에서 보이는 제의적, 종교적 분위기는 아마도 폭력적 이미지를 대하는 이 구도적 태도 자체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그림이 이 사회를 바꾸는데 실제로 작동할 수 있다 믿으며, 그 맹목적 믿음에 헌신하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은 예술가가 지닌 맹목적 믿음을 다룬 카프카의 『단식 광대』를 떠올리게 한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 『단식 광대 Ein Hunger Kunstler』는 단식하는 기술을 공연으로 보여주는 예술가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밤새워 지켜볼 정도로 관객들이 열광했고, 40일이 지난 후 단식을 끝내라는 흥행사의 권유로 공연을 마치곤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관객들이 더는 이 ‘굶기의 예술가’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는 마구간 옆의 동물 우리로 밀려나게 된다. 단식 광대는 그의 단식일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단식을 이어나간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입에 맞는 음식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단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난 후 빈 동물 우리는 젊고 싱싱한 표범으로 채워진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이 소설은 예술과 예술가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된다. 광대는 예술가를, ‘단식’의 기술은 예술 그 자체를 은유하는데 이는 비생산적이며 비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을 의미한다. 단식이라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광대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입에 맞는 음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단식을 가능케 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예술의 의미와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예술가의 믿음, 예술이 사회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맹목에 가까운 믿음을 뜻한다.

 

믿음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카프카는 말했다. 그에게는 소설이라는 믿음이 그를 살게 했을 것이다. 화가 역시 무용하지 않은 그림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림의 무구하고 연약함을 누구보다 알기에 그림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며 도달 불가능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라 믿는 자들이 화가이다. 그렇게 부딪혀 깨달은 불가능의 자리에서 그림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그려나가는 것, 그것이 화가가 지닌 믿음의 윤리이다.

 

‘애도’라는 수행

서고운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녹아내리는 듯한 인체의 형상은 아마도 끔찍한 구조적 폭력에 희생당한 이름 없는 자들의 은유일 것이다. 머리가 제거되고 얼굴이 지워진 육체는 각각의 개별성을 잃으며 군집한 채 녹아내리고 있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이유도 모른 채 고통받는 개별적 존재들을 재현하는 작가가 그들을 녹아내리는 ‘상태’로 그려낸 건 아마도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경계에 서서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연된 시간’은 작가에게 최소한의 ‘윤리’를 확보하는 장치이다. 그녀는 이 개별적 존재들을 ‘죽은 몸’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들의 고통을 재현할지언정 최소한 그 고통을 ‘죽은 몸’으로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지연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력에 희생당한 자들의 고통을 끝까지 고통으로 놔두는 것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목도하고 체념하는 데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동시에 그들을 연민의 바탕 위에서 ‘희생자’로 바라보지 않기 위한 작가가 지닌 애도의 윤리이다. 이 ‘미완의 애도’는 애도의 행위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들며 폭력으로 점철된 비극적 현실을 우리의 삶 앞에 가져다 놓는다. 이는 애도 속에서 애도가 끝날 수 없게 만들며 타자의 타자성을 유지한 채 나의 삶 안으로 그들을 품고자 하는 시도이다.

 

한편, 작가는 이번 전시의 신작 중 하나인 <사상도>(2018)는 구상도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일본의 불화 중 하나인 구상도(九相圖)는 풍장(風葬)을 지낼 때 사람의 시신이 지상에 노출되어 자연히 소멸하는 모습을 9단계로 나눠서 그린 그림이다. 시신이 썩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관찰하여 그려낸다는 것은 서양 회화사에서도 그 흐름을 찾을 수 있다. 렘브란트와 샤임 수틴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으로 이어지는 계보 말이다. 특히, 샤임 수틴(Chaim Soutine)의 <가죽이 벗겨진 소 Carcass of Beef>(1925)는 서고운이 시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유사한 태도를 지닌다. 수틴은 1920년부터 1929년 사이 렘브란트의 <살육된 황소 Slaughtered Ox>(1655)에서 영감을 받은 동물 사체 연작을 10여 점 그려냈다. 죽은 동물의 사체의 모티브는16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도축장의 풍경 자체를 정물화처럼 다룬 렘브란트가 그린 소의 사체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 그 뒤를 이어받은 수틴의 작업은 삶을 제압하는 죽음의 절대적인 힘이 느껴진다. 더 나아가 수틴이 그린 동물 사체 정물화는 사체가 부패해가는 과정의 생생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도축장의 풍경이 피가 덜 빠진 상태의 고깃덩어리가 ‘아직 살아 있음’ 혹은 ‘아직 존재함’을 외치고 있다면, 수틴의 그림들은 죽음에 이미 압도된 채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는 듯 보인다. <사상도> 역시 육신이 썩는다는 상태 변화를 통해 죽음을 받아들인다. 육체를 떠나보내는게 애도의 출발점이듯 그녀는 애도를 수행하기 위해 육체가 소멸할 때까지 죽음의 과정을 그린다. 그렇게 죽음을 기억하며 상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죽은 후 제대로 애도 받지 못한 자들을 위해 그녀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타인의 슬픔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또한, 죽은 동물의 사체, 효수된 머리, 도살된 짐승의 고깃덩어리 등 폭력이란 말에 즉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를 다룰 때 작가는 그것들을 마치 정물화의 정물을 다루듯 그린다. 이미 저질러진 폭력을 응시하며, 그 폭력을 보란 듯이 전시한다. 일종의 소격 효과로 볼 수 있는 이 방식은 보는 이를 목격자로 만들어 모종의 책임을 느끼게 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다. <악의 복화술>(2016), <살육과 우울>(2016)에서도 화면 중앙에 희생된 것들을 그린 다음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 삼각 피라미드 구조 안에 넣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마치 폭력이 우리 주변에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듯 말이다.

종종 그녀의 작업에서 삼각 구도로 구축된 화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신성한 기운을 지닌 인물을 중심축으로 하는 제단화의 삼각 구도와 닮아있다. 이는 풍경을 다룰 때도 보인다.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구도인 화면을 가르는 수평선 중앙에 솟은 나무와 산봉우리 혹은 화면 중심축으로 대칭되는 구성은 종교화에서 많이 쓰이는 구도이다. 게다가 캔버스 여러 개를 병풍 구조로 이어 붙인 작업은 마치 12장의 패널 위에 그린 겐트 제단화(The Ghent Altarpiece)의 구조를 위시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삼각형 캔버스를 이용하여 삼각 구도를 더욱 강화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사라진다>(2018)에서도 역시 회화의 제의적 성격과 불가능한 애도를 수행하려는 작가의 구도적 자세를 볼 수 있다. 삼각형 캔버스는 마치 십자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성은 그녀가 희생자들을 성스럽게 여기며 애도하는 것 자체를 제의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애도의 대상을 일종의 제의적 희생물처럼 성스럽게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다. 모든 성스러움은 그 기원에 원초적 폭력을 은폐하고 있다고 말한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성스러움’이 어떠한 폭력의 기반 위에서 작동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며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제어하기 위해 제의적으로 '희생양'에 폭력을 가함으로써 다른 폭력을 덮는다고 했다. 서고운은 애도의 대상이 제의적 희생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한다. 따라서 그녀는 폭력의 이미지를 소재주의적으로 다루는 것을 경계하며 희생자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진정 체화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질문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내면화하여 그들의 실제적 고통에 다가가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림/미술은 그것을 가능케 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나 한 것일까?

 

맞불의 세계

 

작가는 종종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며 ‘파국 catastrophe’을 언급한다. 아마 그것은 ‘절망’의 다른 말일 것이다.

그녀가 화면에서 재현하는 절망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도와 다를 바 없다. 이미 그녀는 한 차례 <더 디바인 코미디 The Divine Comedy>(2017) 시리즈에서 ‘절망적인 세계’를 보여준 바 있다. 아마 이 절망은 폭력으로 인해 불행의 겪는 이들이 그 불행의 이유도 모른 채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파국의 기미가 난무하는 세계의 풍경을 그린듯한 그녀의 그림은 절망과 고통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들이 경험하는 불행과 고통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충분히 애도 받지 못한 죽음을 슬퍼하며 세상이 끝나버린 후에도 여전히 남아버린 ‘남겨진 삶’을 걱정한다. 그러며 그들의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게 이 세계의 폭력적 구조를 알레고리적 함의를 덧입혀 그려낸다. 한국 사회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재현하여 보는 이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알레고리적 요소들이나 상징들을 사용하여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적 폭력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른 채 그대로 굴러가는 이 끔찍한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어떤 의미 작용을 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녀는 이 화장터와 같은 세계에서 남겨진 불씨로 맞불을 놓는다. 현재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폭력적 세계를 바라보며 더 큰불을 지핀다. 모든 것이 다 타버린 자리에서 그동안 발화되지 못한 죽음들의 울음소리가 우리에게 들릴 수 있도록 맞불을 놓으며 슬픔의 구조를 그려내는 것이 그림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으며 말이다.

예술은 실재적 경험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다시 말해 감각을 발생시키며 민감하게 만든다. 서고운은 그들의 고통을 다루며 ‘슬픔이라는 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하려 한다. 그렇게 슬픔의 구조를 캔버스라는 2차원의 평면 위에서 펼쳐내며 그리기라는 제의적 행위를 통해 그림의 가능성에 다가간다. 모든 가능/불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헛된 것이라 여겨질 때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슬픔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고 믿으며 말이다.

 

Sensing “Sadness”: The Paintings of Goun Seo

JangPa, Artist

The Painter’s Desire, the Ethics of Belief

 

I have often asked other artists what the painter’s desire is. This is not a question I ask of all artists; rather, there are paintings that raise the question. For example, it may occur when I sense the impression of an artist’s life trajectory beyond the pictorial representation shown on a two-dimensional canvas. Conversely, it also applies to paintings that are filled with pictorial images, yet come across as flat and empty canvases. The question of the “painter’s desire” is not meant to gauge some sort of hierarchy of pictorial formativity. It is an inquiry into the fundamental impulse that drives one to paint. I am, so to speak, a person of the old-fashioned belief that there exists a separate “painterly essence.” I am constantly asking questions like “Why does one paint?” or “What is painting?”– but I must answer that I do not yet know. I have even found that the questions only deepen the more I think about the various issues associated with painting. But if there is any meaning to “painter,” it lies in this continued questioning of the self-consciousness and essence of the painting medium. For a painter, it falls in the realm of unavoidable belief to dwell on the “essence of painting”– even when the limits of painting have already become clear.

The reason Goun Seo’s work calls to mind the “painter’s desire” is both because she possesses a ritualistic attitude toward the act of painting itself and because she shows signs of agonizing over what painting is capable of. The ethics of the painter may be to capture and render the structural violence that society has inflicted on the “other” without objectifying the other’s suffering – to paint such things while endlessly considering the impossibility of representation. Goun Seo’s aim is not to examine the possibility or impossibility of representation; she adopts the approach of a seeker of the Way, upholding an ethics of representation that inevitably assumes a level of controversy when one is painting images of brutality. The ritualistic, religious mood seen in her paintings seems perhaps to stem from this very seeking stance with regard to violent imagery. She believes that paintings can actually serve to change a society – and dedicates herself to that blind belief.

 

This belief calls to mind Franz Kafka’s “The Hunger Artist,” a work that concerns the artist’s blind faith.

Kafka’s short story (Ein Hungerkünstler in German) tells of an artist who stages performances showing his fasting technique. At first, the crowds go wild, staying up all night to watch. But by the time 40 days have passed, the artist has typically ended the performance after the promoters recommended that he quit his fast. A few years later on, audiences are no longer interested in the hunger artist, who is shuffled off to an animal cage next to the stables. Even though there is no one keeping track of his fast, the hunger artist continues to starve. He finally confesses that the reason he has continued to starve himself is because he could never discover any food to his liking. With that confession, he passes away, and the empty cage he leaves behind is taken over by a young and vigorous panther.

This story is typically understood to be about art and the artist’s existence. The performer stands in for the artist, while his fasting technique is a metaphor for art – art that is inevitably unproductive and antisocial. What desire could have driven the performer to want to show his fasting abilities? Perhaps what enabled him to fast was the belief that there might be some food “to his liking.” This is a reference to the artist’s faith in seeking to approach the meaning and essential of art – an almost blind faith that art can do something for society.

 

Kafka said that it is impossible to live without belief. It may be that the faith of “fiction” was what enabled him to live. Painter too are people who believe in the potential of paintings that are not useless. Yet painter are also people who know the innocence and frailty of painting better than anyone, and who believe the best recourse is to show the imperfections of painting while proceeding toward something unattainable. To paint from the realm of impossibility one has run up against, believing blindly in painting – that is the ethics of belief possessed by the painter.

 

The Performance of Grieving

The seemingly melting human shapes that appear over and over in Goun Seo’s work may serve as metaphors for those nameless individuals victimized by terrible structural violence. Bodies with their heads excised and faces erased gather and dissolve, stripped of their individuality. In her representation of these individual entities suffering without understanding the reason for the violence inflicted again them – depicting them in a melting “state”– the artist may seek to stand at the boundary where their human dignity disappears, hoping to delay that moment by even a little. But this deferred time is a device to ensure the artist a modicum of ethics. She does not approach these individual entities as dead bodies. The deferred time is necessary to at least avoid objectifying the suffering as “dead bodies” even as she represents it. In other words, her forever leaving the suffering of those victimized by violence as just that –suffering –represents both her desire not to become resignedly “used to” witnessing violence against others, as well as her own ethics of grieving, her wish not to view them as “victims” from a position of pity. It is an “incomplete grieving” that takes the act of grieving into the present tense, placing before our own lives a tragic reality marked by violence. Within grief, this prevents the grieving from ending, seeking to embrace the other within our lives while retaining its otherness.

 

For Four Figure Paintings (2018), one of the new works in this exhibition, the artist has said that she drew on a kusôzu motif. A form of Japanese Buddhist painting, the kusôzu(九相圖) depicts the nine stages of natural decay as a human body is expected to the elements in a sky burial. The observation and rendering of the decomposition process is also a current that can be found in Western art history – a lineage that includes Rembrandt, Chaim Soutine, and Francis Bacon. Soutine’s Carcass of Beef (1925) in particular adopts a similar attitude to Goun’s in observing bodies. Inspired by Rembrandt’s Slaughtered Ox (1655), Soutine painted around a dozen works showing animal carcasses between 1920 and 1929. The dead animal motif can be seen in many Dutch works from the 16th century; the slaughtered ox by Rembrandt, who treated the slaughterhouse landscape like a still life, recalls Jesus Christ sacrificing Himself on the cross. Carrying on that legacy, Soutine’s work suggests the absolute power of death in subding life. Soutine’s still life images of animal carcasses further capture the decomposition process in all its graphicness. Where the still-bloody meat in the abattoir landscape seems to declare some continued life or existence, Soutine’s images seems to show a process of accepting death after already being overwhelmed by it. Death is likewise accepted in Four Figure Paintings through the decomposing body’s changing state. Just as letting go of the body marks the beginning of grief, Goun paints the process of death all the way through the body’s extinction as a performance of grief. In this way, she remembers death and confronts loss. For the sake of those whose deaths were never properly grieved, she seeks to remember, to record, and to approach the sadness of others.

 

When dealing with the kinds of images that are more readily associated with “violence”– animal carcasses, decapitated heads on display, slaughtered beasts –the artist does so as though approaching the objects in a still life. She confronts violence that has already been perpetrated, exhibiting it ostentatiously. What could be seen as a kind of alienation effect is a device to turn the viewer into a witness, making him or her sense a sort of responsibility. For Ventriloquism of Devil (2016) and Depression and Slaughter (2016), Goun painted the images of the slain at the center of the canvas and then placed them within a triangular pyramid structure for further emphasis – preventing viewers from simply passing them by, as though to remind them of the continued existence of violence around us.

Images with a triangular composition can often be found in Goun’s work, resembling the triptych structure of an altarpiece where a figure with some divine spirit is positioned at the center. They are also seen in cases of landscapes. The compositions frequently used by the artist – trees and mountain peaks rising up at the center of the horizon as it divides the canvas, symmetry around the canvas’s central axis – are often found in works of religious painting. Works in which several canvases are connected into a folding-screen structure give the sense of having originated in the structure of the Ghent Altarpiece, a work painted across 12 panels. All That Exists Disappears (2018), which uses a triangular canvas to intensify the triangular structure, shows both the ritualistic character of Goun’s painting and her compositional attempt at an impossible performance of grief. The triangular canvas serves a purpose akin to the cross – a composition showing that the artist views the slain as holy and is ritualistically addressing grief itself.

This is a different matter from viewing the object of grief as a kind of ritual sacrifice. René Girard said that all sacredness conceals the primitive violence at its source; in Violence and the Sacred, he inquired into the foundation of violence upon which the sacred function. He also noted how the ritual inflicting of violence on “scapegoats” to control internal conflicts within a community serves to cover up other violence. Goun Seo is alert to the way the object of grief may be seen as a ritual sacrifice. Because of that, she is wary of approach images of violence in an “issue-centered” way, striving to actually embody the suffering of those sacrificed as her own suffering without objectifying it.

For all these efforts, there are certain questions that repeatedly arise. Is it possible to internalize the suffering of others and approach their actual anguish? And does painting/art even possess the capability to enable that?

 

The World of the Counterattack

In explaining her work, the artist often refers to “catastrophe”– possibly as another word for “despair.”

The despair she represents on the canvas is no different from the images of hell that appear in Dante’s The Divine Comedy. Indeed, she has already shown the world of despair once before in her The Divine Comedy  (2017). That despair may stem from the fact that those suffering misfortune through violence suffer without knowing the reason for their fate. Seeming to depict the landscapes of a world where signs of catastrophe abound, her paintings are not meant to represent despair and suffering. Goun is asking what meaning could possibly exist in the misfortune and anguish they experience. She grieves the deaths of those insufficiently mourned by our society, while also worrying about the lives “left over” once the world has ended. To prevent their suffering from being meaningless, she depicts the violent structure of the world with an added layer of allegorical allusion. While she could represent the tragic incidents in Korean society in an explicit way and confront the viewer directly, she instead maintains distance by using allegorical elements and symbols – she believes this is the best that she can do, hoping some meaning can be produced by rendering a terrible world so inured to societal violence that it simply moves along, not even recognizing violence as such.

Goun answers with her own fire, using the embers left over in this crematorium of a world. By resisting the structural violence of today, she observers a brutal world and stokes a bigger fire. She believes that this is what painting is capable of doing – rendering a structure of sadness and lighting a response fire where everything has burned away, so that we can hear the cries of deaths hitherto unspoken.

Art guides us into real experience. It causes senses to arise, sensitizes us. In dealing with suffering, Goun seeks to keenly capture the “sense of sadness.” Displaying this structure of sadness upon the two-dimensional canvas, she uses the ritual act of painting to approach the possibilities of painting – believing as she does that while the whole debate over possibility/impossibility may sometimes be seen as vain, it can at least add to the depth of 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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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눈 없이 보기, 귀 없이 듣기, 입 없이 말하기 

─ 서고운의 작품들이 조각 없이 조각내는 것과 애도 없이 애도하는 것

 

최 정 우 (비평가, 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서고운의 작품을 처음으로 봤던 때가 언제였던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을 그의 화력(畵歷)을 생각할 때, 아마도 2011년의 어느 언저리쯤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하여 회고할 뿐이다. 그러나 처음 봤던 순간의 그 열광만큼은 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서고운의 작품을 처음으로 봤던 곳은 어디였던가. 만약 이 물음이 그의 작품을 육안(肉眼)으로 직접 본 장소를 묻는 질문이라면, 나는 그곳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어떤 단체전이 끝나갈 때 즈음, 나는 오로지 그의 작품만을 보기 위해서 전시회 마지막 날에 한 전시장을 찾았고, 거기서 나는 작가와 그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직접, 그것도 동시에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작품들을 철수하고 있었고, 미안하고 동시에 감사하게도, 나는 다시 포장되어 작업실로 귀환하기 직전에 놓인 그의 작품들을 재차 열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작품들을 그저 그렇게 떠나보내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아쉬워 용달차에 작품들을 실을 때까지 그 작품들과 함께했다. 보이던 작품들은 다시 포장되었고, 그렇게 다시금,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보이게 될 것이(었)고, 또한 다시 보게 될 것이(었)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고 첫 응시였다, 그렇게 기억한다. 하여 나는 이 만남과 응시를 하나의 작지만 분명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 작품들은, 눈 없이 바라보고, 귀 없이 귀를 기울이며, 입 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이 부재(不在)의 사건이 존재(存在)했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앞으로 그러한 부재가 간헐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예고, 바로 이러한 사실과 예고에 관한 것, 바로 이 사실과 예고 사이에 위치한 어떤 시간과 공간, 그 기이한 좌표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건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무엇이 사건인가, 그림이 묻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살기 위한 어떤 치열한 의지가 아니라 죽음을 바라보는 어떤 치명적 관성을 향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방향성의 눈을 지니고 있어야 할 그림 속의 ‘증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그 눈, 혹은 얼굴이 가려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눈이 없는 존재, 보고 있으면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맹인, 뒤통수는 존재하지만 얼굴 자체는 부재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그런 이상한 목격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림을 바라보는 나는, 바로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보이지 않는 증인의 증언에 대한 또 다른 증인, 저 목격할 수 없는 목격에 대한 또 다른 목격자가 되고 있다. 거기에 사건의 형태로 놓여 있는 것은, 원인과 과정과 결과가 확연히 그려지는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녹아내리는 육체’가 있는 풍경, 따라서 숫제 풍경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부재하는 사건의 풍경이다. 이야기 속의 화자 또는 그림 속의 목격자가 바라보는 어떤 사건, 그러나 동시에, 이야기 속의 벙어리 또는 그림 속의 눈먼 이가 말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는 어떤 사건, 이 기괴한 사건을 바라보는 기괴한 목격자라는 또 하나의 사건을, 나는 그렇게 말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말하거나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다시 묻자면, 이 불가능한 사건 앞에서, 그림 안의 증인은, 그리고 또한 그림 밖의 목격자는, 어떤 애도를 표현해야 하며 또한 표현할 수 있을까.

 

무엇을 애도하는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애도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애도가 과연 가능할까. 섣불리 대답하자면, 그러니까 바로 이 대답을 가장 멀리 지연시키기 위해 대답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애도란 어떤 확정적인 대상에 대한 확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연약하고 무력한 이들’이란 그림 속의 어떤 특정한 존재나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명명 혹은 호명은 어쩌면 이름 부를 수 없는 그림 밖의 또 다른 목격자들의 ‘이름’을 위한 것, 따라서 여기서 애도되는 것은 아마도 그림 밖에서 그림 안을 애도하는 자, 바로 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애도는 어쩔 수 없이 깊은 늪 안으로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면서 우울증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 말 그대로 여기서 애도는 그 자신의 탈을 바꿔 쓴다. <애도의 사막>의 이러한 탈바꿈 속에는 서고운의 작품들이 이후 계속해서 반복하고 변주하며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형상들의 어떤 원형이 담겨 있는데, 여기서의 ‘원형’이란 기원으로서의 원형(原形)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발생학적 단위로서의 원형(元型)에 더욱 근접하는 것이다. 도살되거나 조각난 (그러나 바로 그럼으로써 접합되는) 고깃덩어리, 얼굴도 없고 표정도 없는 (무표정의 표정을 지닌) 인물들의 군상, 널브러져 있거나 녹아내림으로써 (비로소) 전시되는 육체들, 무대를 구획하기도 하고 제거하기도 하는 천들과 막들, 더럽거나 정갈한 식탁 혹은 성스럽거나 상스러운 제단, 하늘과 땅 혹은 위와 아래의 (불분명하나 분명 존재하는) 대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모든 형상들에 의해, 오히려 애도하려는 자는 그 스스로가 애도되며, 거꾸로 애도되는 대상은 애도를 통해서 사라지기는커녕 다시금 더욱 일그러진 불안의 형태로 귀환하고 회귀하게 된다. 애도하는 자는, 그 자신의 애도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교살되며 질식한다.

 

서고운의 풍경 속에서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Vanitas, lux mea, (진리가 아니라) 허무야말로 나의 빛인 것. ‘바니타스 정물(Vanitas' still life)’의 주제는 여기서 또 한 번의 언어적 변용을 하게 되는데, 서고운의 그림들 안에서 증식하고 번식하며 창궐하고 있는 ‘정물(still life)’이란 또한 ‘아직도 살아 있음(still living)’에 대한 죽음의 증거, 다시 말해 부재의 존재에 대한 증언이자 불가능의 가능성에 대한 목격이 된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이렇게 그 존재가 가능해지는 증언과 목격은, 바로 그 존재 자체 때문에, 동시에 부재하고 불가능한 어떤 것이 된다. 죽어 널브러진 것들의 일견 정적인 배치의 구도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들, 곧 지금도 여전히 살아내야 하는 것들의 적나라한 구조와 힘을 폭로하고 노출시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시각적 변증법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여기서 더 중요한 것, 더 시급한 문제는, 보이게 하는 힘과 보게 하는 힘 사이의 변증법적 투쟁이다. 서고운의 작품들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이 만약 어떤 ‘결과’를 그려내고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투쟁의 전장(戰場)일 것이며, 만약 그것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 것들의 어떤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이러한 싸움의 풍경(風景)일 것이다. 그것들은 눈 없이 응시하고 귀 없이 경청하며 입 없이 고함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복화술사들>을 바라봐야 한다, 눈 없이, 그리고 또한 말해야 한다, 입 없이. 입 없이 무언으로 말하고 있는 존재들, 잘려진 손만으로, 오직 그 손에 달린 손가락만으로 무언가를 헛되이 가리키려고 애쓰는 존재들, 형상들, 사물들, 조각들, 조각 없이 조각난 조각들, 하여 애도 없이 애도를 반복하는 헛된 부재의 존재들. 고깃덩어리 밖으로 숨 막히듯 답답하게 삐져나온 머리는 머리카락을 문 채로 입을 다물고 있고, 종이로 만들어진 것처럼 힘없는 얼굴은 입조차 막혀 있는 불능의 상태이다. 말하자면 문제는, 바로 이러한 불가능의 상황에서 어떻게 가능성의 조건들을 끌어내는가 하는 것, 그림을 통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실의 불가해함 속에서 어떻게 다음 발걸음을 딛는가 하는 것이다. 하여 나는 서고운의 작품 <구토>야말로 그가 눈 없이 바라보고 귀 없이 귀 기울이며 입 없이 말하려고 하는 본령이 가장 잘 드러난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토> 안에서 인물은─물론 그것을 ‘인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그 자신의 배설의 위치, 배변의 장소에서 오히려 거꾸로 무언가를 게워내고 있다. 게다가 그것도 입이 아닌 곳으로, 입으로 게워내야 할 것을, 기어코 입이 아닌 다른 곳을 통해, 조각난 얼굴의 틈으로, 반쪽이 난 두개골의 틈으로, 더욱이 먹는 것인지 싸는 것인지 모를 어떤 구멍으로, 그렇게 게워내며 또한 흡입하고 있다. 이 ‘구토’의 풍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이 질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러니까 이 질문이 묻고 있는 ‘이해’를 정말 이해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당신은 나의 글을 허투루 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토의 풍경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역전된 배설, 이 역설적 섭취, 이 전도된 사건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을 그린다는 것, 그리고 그런 풍경들을 부조리하게 살아낸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불가해한 풍경과 부조리한 생존을 통해서만 비로소 어떤 목격이, 어떤 청취가, 어떤 증언이 가능해진다는 것, 다시 말해서, 죽음을 향한 눈먼 바라봄을 통해 비로소 어떤 시선이 가능해지고, 부재를 향한 귀먹은 귀 기울임을 통해 비로소 어떤 청취가 가능해지며, 불가능에 대한 입 없는 발설을 통해 비로소 어떤 애도의 증언이 가능해진다는 것, 하여 이 불가능한 가능성을 계속해서 그려나가겠다는 것, 나는 이것이 서고운의 작품들이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으며 또한 걸어갈 어떤 ‘애도의 사막’, 그렇게 차려낼 ‘부조리한 식탁’이라고 생각한다. 서고운의 작품들은 따라서 그 자체로 ‘예기치 못한 사건’이며, 그러나 동시에, 그런 예기치 못한 사건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진행의 풍경을 문제 삼는 것, 그 풍경을 보이게 하는 힘과 보게 하는 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사유하는 것, 그런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서고운의 하얀 식탁보 위에 한편으로는 가장 성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가장 더럽게 차려진 제단, 그 위에서 가장 익숙한 것들이 가장 낯설게, 그리고 가장 생경한 것들이 가장 친숙하게 교차하고 교살되며 교미한다. 그러므로 저 제단 위에서 눈을 감아 그림을 바라보고 귀를 닫아 그림에 귀 기울이며 입을 닫아 그림을 증언할 몫은 온전히 나와 당신의 것으로 남는다. 나와 당신은 이 성스러운 것과 더러운 것의 몫을, 구토를 하며, 다시 삼키며, 그렇게 살아내며, 수행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바로 거기서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질 것이며, 또한 우리가 그러한 사건들을 벌이게 될 것이다. 눈 없이, 귀 없이, 입 없이,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조각내듯 다시 접합하면서, 그렇게, 바로 그 ‘사이’에서.

 

 

Seeing without eyes, hearing without ears, talking without mouth

― What the paintings of Seo Goun fragment without fragments and mourn without mourning

 

Choe Jeong U

 

The paintings of Seo Goun stare fixedly at something without eyes, listen carefully to something without ears, and give testimony for something without voice or mouth. They are the proofs of some events in which the gaze meets the objects in a fundamental way. Here and now, they see something and are also seen to something. What I am going to tell you from now on is the fact that this absent event is present or the anticipation that this inexistent event will exist. The paintings of Seo Goun are all about a space-time located between that fact and this anticipation, or about an event that occurs in the coordinates of this space-time.

So, above all, we have to talk about the nature of this event. When an event occurs, we usually examine its process and its causality. Only through this holistic examination, we think that we can finally understand an event as ‘the event’. Therefore, this kind of analytical understanding of the event is not a logical structure, rather a method of survival. We try to understand the events in order to live, much more exactly, in order to survive. However, for example, one of her paintings «Imprévu I», it tells us a different story about another concept of this event. It seems (also, sounds) that it shows us a different picture of the event or sings us a different song about the event. What is the event? This is the very question that the painting asks us. The perspective of the event in this painting is not oriented towards an indomitable will to live but faces a fatal inertia for death. But when we see the witness in the picture, we cannot find her eyes anywhere, even though she should have them. She is the witness without her own eyes. She just stands there in bloody fur, not moving an inch on a snowfield. Maybe she sees something and witnesses the tomb of those incomprehensible figures in front of herself. But her eyes themselves, they are unseen. No, from the beginning, we are even unsure of that we could find the eyes on her face in the other side of the picture. She is the witness without eyes, the weird blind who sees but cannot see something at the same time, and the eyewitness who has neither her eyes nor her face. So here, when I see this witness in the picture, I become another witness that witnesses the blind and invisible witness in the picture. The event witnessed in this picture is not one that can be explained clearly and surely by causality, but one that can be described ― as the title of a painting of Seo Goun’s, «Body melts into bottom» ― only by the melting landscape of the absent/present event. And I want to define this nature of the event as the impossibility of the painting. This impossibility exists between the present event that can be seen by the witness in the picture and the absent event that can be neither seen nor witnessed by the very blind and mute witness. Here is a paradox of Seo Goun’s paintings, because it is this impossibility that makes the painting itself possible in her works. So we can ask again. How can the witness in the picture (or the other witness outside the picture) express his or her mourning, in front of this impossibility of the event?

Is it really possible, such a mourning that doesn’t know what to mourn, how to mourn and the reason to mourn? Maybe it will be impossible again. First of all, here in the paintings of Seo Goun, the mourning is not a certain feeling about a defined object. There is no object in this mourning. In the desert of mourning, the name of weak and helpless people is not for a certain existence or object in the picture. This kind of naming or calling is for the other witnesses outside the picture, which cannot be named. Therefore, it is only the witness outside the picture who mourns its inside that can be really mourned here. So this mourning without objects changes more and more into the melancholy, sinking into the desert deeper and deeper. «Desert of mourning» contains many prototypes of Seo Goun’s paintings, which recur, vary and develop afterwards. By the way, these prototypes are not origins but rather embryological units of her paintings. For example, the flesh that is fragmented and slaughtered but inosculates again by the same action, the group of figures without faces but with expressionless expressions, the bodies that can be exhibited only by letting or melting down, the curtains and the screens that divide and also exterminate the stage, the table that is clean or dirty, the altar that is sacred and profane at the same time, and the contradiction that exists vaguely between up and down, between the sky and the ground. Here again, the witness outside the picture becomes the mourner who is mourned by himself, and the unsure object of this mourning, which never disappears, comes back in a more distorted shape of anxiety. The mourner, in his own mourning, slowly and surely, suffocates strangled.

 

 

 

Therefore, the landscape is not the form that simply shows us only the effect. The event that in appearance seems paused and stable in the paintings of Seo Goun, is not an effect in itself but an ongoing stuff. Vanitas (not Veritas) lux mea. The vanity is really my light. Still life which varies and multiplies in the paintings of Seo Goun is the proof of death against ‘still living’ things, in other words, the testimony of absence against presence, and the witness of the possibility by the impossibility. The structure of dead things rather exposes the force of still living things. So here the optical dialectics between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is not the problem any longer. Rather, the important thing is the dialectical struggle between the force that makes something visible and the force that makes something invisible. If we can say that the paintings of Seo Goun express some kind of ‘effect’ of the event, we have to say that it’s the battlefield of this struggle. And if we can say that she paints some kind of ‘process’ of the living things, we also have to say that it’s the same battlefield. They gaze without eyes, listen without ears, and yells without voice.

 

It is in this perspective that we have to see one of her paintings, «Ventriloquists», in other words, without eyes. And we also have to talk about this painting, without mouth and voice. The mute existence that tells something without mouth, the fragmented existence that points something with the fragmented fingers, without the body, in vain, and the absent existence that repeats the mourning without mourning. The suffocating head on the flesh shuts its mouth with the hair in it, and the impotent face made by papers is in the state of impossibility even with closed mouth. So the problem of the painting is how to extract the conditions of possibility from this situation of impossibility, and how to take a next step for the painting in this difficulty of reality. In this sense, I want to focus on her painting «Vomiting», which shows us most fundamentally what she wants to see without eyes, listen without ears, and tell without mouth. The person in «Vomiting», if any, vomits something from the very position of excretion, upside down. Moreover, it vomits what it has to vomit by the mouth, rather through the place which is not the mouth, through the hole of the fragmented face, through the gap of the cracked skull. We don’t know whether it’s for eating or for excreting. It vomits and inhales like that. So how can we understand this ‘landscape’ of vomiting? But if you really try to ‘understand’ this situation, you’re just wrong. This landscape of reversed and inverted event is something incomprehensible to us. To paint this incomprehensible landscape, to live this absurd and ironic life in the landscape, to make possible the witness and the testimony only by the survival in this landscape, in other words, to make seeing possible only by the blind watching of the death, to make listening possible only by the deaf hearing of absence, to make mourning possible only by the mute talking about impossibility, and so finally, to continue to paint these impossibilities. All these things, I think, are the paths that Seo Goun wants to choose, even in the very impossibility of the choice. Therefore, I also think that her paintings are the events in themselves which shows the tension between the force that makes the landscape visible and the force that makes it invisible. Her painting is the altar on which the event becomes more sacred and more profane at the same time. So, in front of her paintings, we have to see them with eyes closed, we have to listen to them with ears shut, and we have to give testimony without mouth and voice. It’s our share. And maybe someday the paintings will give us some eyes, some ears, or some voice. Then we can see, listen, and tell. Again, without eyes, without ears, without mouth, but at the same time, in the very gap, which inosculates all the fragmented again, and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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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유령들의 귀환

-서고운 개인전 <사라진 모뉴먼트> 서문-

 

신혜성 (미술비평)

 

11월,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차가운 바람이 분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으슬으슬한데, 폭력과 죽음을 기묘하게 다루고 있는 이미지는 사뭇 무겁고 진지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그림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말투는 친절하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그림은 마치 햄릿의 죽은 아버지의 유령처럼 신비롭고 비장하게 말한다. 어떤 이는 이런 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며 쉽게 등을 돌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령은 그 자리에 남아서 당신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유령이 돌아오는 것은 우리에게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적절한 애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서고운의 작품은 일상적인 장면을 재현하지 않으며,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알레고리들이 멋진 색채와 함께 얽혀있다.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이미지들이 파편처럼 조합되어 있기 때문에, 관람자는 그것들을 연결하여 어떤 서사를 구성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럴 듯하게 추리하기란 쉽지가 않다. 다행히도 작가는 “이게 도대체 뭘 그린 거죠?” 라는 다소 무례하고 유치한 질문을 기꺼이 환영한다. 하지만 작가의 설명조차도 속 시원한 해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집트 사람들의 비밀은 이집트 사람 자신에게도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작가는 자신이 왜 이런 이미지를 구상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경험을 들려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사연이 그림의 신비를 모두 밝혀주진 않는다.

그림 속에 나타난 알 수 없는 시공간과 충격적인 사건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빠져들었던 토끼굴이라는 심연처럼, 관람자를 또 다른 세상으로 끌어들인다. 그 곳은 작가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내면의 공간이겠지만, 서고운이라는 한 개인 안에 닫힌 공간이 아니다. 그녀가 자신의 밑바닥에 감추어둔 해골이 어느 새 나와 함께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이며, 우리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서고운의 그림은 호, 불호가 분명히 나뉘는 스타일 같다. 어떤 이는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들지만, 다른 이는 보자마자 이미지들이 기괴하다며 고개를 돌린다. 솔직히 나는, 오늘날 영화나 현대미술 작품들의 자극 수위를 생각해 보건데, 서고운의 작업이 그 정도까지의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잘 이해할 수 없다. 여하튼 자신이 멜로 영화의 취향을 가져서 모든 액션이나 호러 장르의 영화라면 덮어놓고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액션이나 호러 영화 중에서 어떤 작품이 더 좋은 작품인지에 대하여 깊이 있게 대화할 수 있을까? 서고운이 작가로서 선택한 방향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이 방향에서는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작업일까를 논의하는 것이 공회전과 같은 에너지의 낭비를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은 미술사의 계보학적인 추적을 통하여 기존의 어떤 사조, 어떤 작가와 비교하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혀보는 분석의 작업을 보류한다. 물론 그녀의 작품 뒤로 예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작품들이 그림자처럼 겹쳐져 어른거리는 걸 감지한다. 그것을 원본성과 모방이라는 다소 고리타분한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왜 굳이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가는 젊은 작가가 이러한 이미지에 매료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더욱 흥미롭다고 여긴다.

작가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작품만 본다면, <희생자들>이나 <위령의 날>처럼 이국적인 풍물들이 많이 등장했던 그녀의 예전 작업들은 제3세계 출신의 어느 작가가 고향의 문화를 반영한 그림이라고 여길 수 있다. 또한 <검은 거울이 있는 풍경>이나 <유폐된 공간에서> 와 같은 집단적 죽음의 현장은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에 대한 재현물일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그것은 작가의 무의식적 창작 행위가 만들어낸 가상적 시공간에 허구적 사건이지만, 작가에게는 자신에게는 현실보다 더욱 생생한 이미지였을 것이다. 허구적 진실성, 나는 바로 그 지점이 작가가 일종의 특유한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작지만 단단한 발판이라고 생각한다.

서고운의 작가 노트를 넘겨보다가, 초현실주의자들에게는 초현실 자체가 바로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보다도 더욱 진실되고 실재적인 현실이었음을 통찰력 있게 직시하는 짧은 구절을 찾아냈다. 그녀가 적어보낸 그 문장에는 일렬로 늘어선 한글 문자 사이에 알파벳으로 적힌 REAL 이라는 한 단어가 껴있었다. 그것을 리얼이라고 읽을지, 레알이라고 읽을지 별 상관도 없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어떤 소리로도 읽을 수 없는 하나의 이미지로서의 REAL일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그 문장은 한국어와 외국어라는 두 언어의 층위 사이에 불편하게 걸려있는 모양새, 오직 그렇게 불안정하게 걸쳐진 위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방법으로,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이 지닌 진정성을 증언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서고운 작가가 자신의 삶의 터전보다도 낯선 여행지의 강렬한 경험에서 작업의 영감을 얻는다는 인상을 받았고, 사실적인 역사보다는 전설이나 신화에 기반하고 있다고 느꼈다. 일상의 현실에 묶여있는 우리가 미지의 시공간으로 강렬하게 접속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나는 혹시나 작가가 지금, 여기에서 도피하며 다른 세상만을 동경하는 것은 아닌지에 살짝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신작으로 등장하는 <마지막 대륙>을 보면서, 그녀가 창조하는 시공간은 여러 의미의 차원이 중첩되어 있으며, 그 중엔 우리가 지금, 여기라고 인식하는 차원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표현 방법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관람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을 거부한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며, 직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인다.

 

작가는 분명히 자신의 관심사를 유지해오고 있다. 진짜인지 아닌지 확증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이것과 저것의 사이에서 탄생한 괴물들을 서고운은 꾸준히 다루어왔다. 작가는 스스로가 그것들에 매혹당해 있는 만큼, 그녀의 그림은 기이한 괴물이 되어서 보는 이를 매혹시키려고 한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저 야릇하고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것을 생생한 이미지로 만들어 우리 눈앞에 출몰시킨다. 이미지의 힘이란, 보는 이가 그것이 단지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더라도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 심리적 에너지가 격렬한 폭발을 일으킬 때에는 기묘한 아름다움마이 뿜어져 나온다.

서고운은 이미지 자체가 지닌 그 힘을 믿으면서, 여러 이미지들이 화면으로 튀어나와 그들의 방식대로 떠들어대도록 허락하기 위해 애쓴다. 이미지들이 얽히며 만든 이야기가 설령 우리들의 일상적인 어법에 맞지 않더라도, 이미지가 스스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보존해주려는 의지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 굳이 내가 끼어들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정돈하지 않겠다. 이미지가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두자. 나는 그것들이 꼭 전해야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화폭 위로 돌아온 유령들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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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괴물 충동적인 감각의 해방적 노출 - 서고운의 전시 <스핑크스의 눈물>에 부쳐

 

조광제(철학, (사)철학아카데미)

 

I. 작가 서고운의 괴물

 

서고운의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되는 작품은 「교살당한 자들의 발라드」이다. 이 작품은 제출된 여러 다른 작품들의 원형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에 들어 있는 주제들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대단히 복합적이고 그만큼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초적인 여러 토대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살해와 피살, 금기와 위반, 감시와 처벌, 인간과 짐승, 동물과 식물, 성욕과 인식, 축복과 저주, 억압과 분출, 뚫림과 배설 등. 그런가 하면 이 작품은 그 구성 방식에 있어서 이중교차적인 키아즘(chiasme)의 논리를 활용하고 있다. 현전과 부재는 물론이고 봄과 보임, 봄과 보지 못함, 안과 밖, 수동과 능동 등 간의 이중교차적인 상호치환의 논리가 구사되고 있다.

오른쪽 검은 액자 거울 속 8명의 구경꾼들은 이 작품의 내면 공간을 들여다보면서 내면 공간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가 된다. 안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교살의 장면을 아마도 강제적으로 목도함으로써 교살되는 일을 함부로 자행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에 들어있는 '교살당한 자들'을 염두에 두게 되면 이들은 이미 교살당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액자 속에 갇힌 채 죽어 있다. 살해당한 자들이 살해당해 마땅한 욕망을 감시 · 검열하고 있는 셈이다. '감시를 통한 감시를 통한 감시...' 정작 감시당하는 자는 90도 각도로 엇비슷하게 마주보고 있는 또 하나의 액자 속 잿빛 톤의 그림 속에 들어있다. 액자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억압되어 갇혀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만약 액자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는 위반을 하기만 하면 당장 전기의자를 비롯한 교살의 장치들에 의해 처벌·살해되고 말 것이다. 감시 하에 억압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두 손에 의해 강압되는 맹목을 당하고 있는 털북숭이 반인반수의 괴물이다. 이 괴물의 양 옆에는 잘라진 남자의 성기들을 이어 붙여 세운 두 기둥이 있고, 괴물의 발아래에는 비릿한 배설물의 냄새를 풍김직한 액체가 흥건하다. 두 기둥에서 자라나고 있는 식물들은 '몸에서 자라는 식물'인 체모를 충분히 연상케 한다.

그런데 왜 괴물은 눈이 두 손에 의해 가려지고 있는 것일까? 인식의 원천인 두 눈은 감시와 처벌의 장치들을 받아들여 내면화하는 핵심 통로다. 이를 가림으로써 원초적인 충동적 감각으로 넘쳐나는 성욕의 지대로 확실하게 들어가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식이 발동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괴물의 두 눈을 가리고 있는 두 손은 오히려 괴물 자신에게서 절로 생겨나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강렬한 에너지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인식을 거부하는 맹목은 원초적인 충동적 감각의 질펀한 성욕을 전신으로 향유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이로써 일견 강압에 의한 맹목은 그 심층에 있어서 자발적인 맹목임이 드러난다.

이 반인반수의 자발적인 맹목의 괴물은 회화 작품 「파란사자인간」과 조각 작품 「경계 안에서 울다(Mourn In Boundary)」을 통해 아예 독자적인 방식으로 복제 · 재생되어 나온다. 작가 서고운이 이 반인반수의 괴물에 더없이 집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란사자인간」은 이원화로 되어 있다. 오른쪽 그림은 마치 화판의 바깥에서부터 두 손이 나와 강제로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보아야 마땅한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강압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위장된 감시와 처벌의 세계를 애써 보지 않으려는 괴물 자신의 강렬한 각오라고 해야 한다. 그럴 때 오히려 보이는 것이 바로 괴물 주변의 형상들이다. 지독하게 단단하고 예리한 부리를 놀리는 새는 괴물의 푸른 깃털들을 뽑아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따끔따끔한 고통은 오히려 충동적인 성욕의 감각을 한없이 배가시킬 것이다. 왼쪽 그림에서 괴물은 이제 제 스스로 눈을 감고 있다. 강제와 자발이 이중교차적으로 치환되면서 보지 않음으로써 보고, 봄으로써 보지 못하는 이중교차적인 키아즘의 논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제 「경계 안에서 울다(Mourn In Boundary)」를 통해 아예 이 괴물을 액자 바깥으로 끄집어낸다. 괴물을 '함부로 위험하게' 해방시켜 우리가 눈을 번연히 뜨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실재의 공간 속으로 이 위험한 괴물을 과감하게 끌어낸 것이다. 이 푸른 괴물은 작가 서고운의 심층적인 자화상임에 틀림없다. 이 괴물은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동시에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애처롭기 짝이 없는 동시에 용감하기 짝이 없는 작가 서고운의 '발가벗은' 자화상이다.

 

 

II. 괴물의 눈으로 본 풍경들

 

그 외 「녹아내리는 육체」, 「죽음의 모래가 부서져 날리는 곳」, 「푸르키녜」 등의 세 작품은 괴물의 몸 속 눈으로 본 풍경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풍경들은 특히 한국에서는 그동안 어느 누구도 쉽사리 표현하고자 시도한 적도 없고 시도하기도 쉽지 않은 이른바 초현실주의 예술 정신에 의한 것이다.「녹아내리는 육체>는 「교살당하는 자들의 발라드」에서 보이는 '감시자인 희생자들'의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교살당하는 자들의 발라드」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유사한 의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일단 그 수가 8명에서 21명으로 더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바깥 공간과 이들이 보고 있는 안 공간이 기실 동일한 존재의 안과 밖임은 똑같은 구조다. 충동적 감각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항상 위태롭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21인의 인물들은 액자 속에 갇혀 죽어 있다. 그런가 하면, 양쪽의 벽을 통해 홍수 난 하수구처럼 쏟아져 내리는 액체는 강렬한 충동적 감각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충동적 감각이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차단된 공간을 점점 더 높은 수위로 채우고 있다. 그 속에서 잿빛 톤의 인간들은 명상에 잠긴 듯 액체 속으로 녹아내리면서 서로의 개별성을 넘어서서 서로에게 녹아들어가는 일종의 죽음의 제의를 태연하게 연출하고 있다.

「죽음의 모래가 부서져 날리는 곳」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전체적인 잿빛 톤을 배경으로 핑크빛으로 그려 죽는 나뭇가지들에 매달아 놓은 내장 기관 비슷한 것들이다. 심장과 창자들 그리고 성 기관 비슷한 것들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마침 두뇌나 눈과 귀 등이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간적인 일상의 삶을 아예 제거해 버린 것이다. 제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각기 알아서 짐승을 닮은 핑크빛 기관들, 그것들은 작가 서고운의 자화상인 괴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기관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죽음의 모래가 부서져 날리는 곳'에 걸려 죽음에 저항하면서 죽음을 불사하고 있다. 물론 일상의 삶은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푸르키녜」는 위 두 작품에 비해 어쩌면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것이 아닐까 싶다. 장엄한 구도에서도 그렇고 배치되어 있는 조형 요소들에서도 그렇다. 푸른 색조로 처리된 아치형 구조물은 분명 신전과 같은 신성한 장소를 나타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운데 공중으로 들린 푸른 두 기둥은 목구멍의 목청을 연상시키기에 이 장소는 목구멍을 크게 확대한 것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그런 구도에서 보면, 얼굴도 없이 그저 기다란 줄을 내 보이는 사제 앞에 정신병원에서 쓰는 죄임 옷을 입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서 혀를 내밀고 있는 장면은 펠라치오의 성욕을 드러내는 것으로 된다. 이에 신성함과 관능성이 이중 교차적으로 치환되고 있다고 말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위태로운 사면을 따라 여러 체위의 성행위에 의해 뒤엉켜 얼굴 없이 그저 몸뚱어리로만 나뒹구는 형상들은 마치 신전에 바치는 제물들인 양 여겨진다. 그와 어울려 방파제를 만드는 거대한 십자 콘크리트 덩이들이 유사성의 원리에 의해 몸뚱어리로 비치도록 한 것은 페티시즘적인 욕망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III. 작가 서고운의 초현실주의

 

작가 서고운은 마치 무당이 작두 칼날 우에서 춤을 추듯이,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충동적 감각의 붓을 놀린다. 그 경계 위에서는 차가운 관능과 뜨거운 신성이 뒤범벅이 되어 한바탕 몸의 사육제를 벌인다. 여기에서 성립하는 작가 서고운의 초현실주의 예술의 세계는 몇 가지 형식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르네 마그리트와 일정하게 닮아 있으면서도 그의 아이러니에 의거한 지성적 초현실의 세계와는 달리 표현주의적인 측면을 지녔다. 그녀의 작업을 표현주의적인 초현실주의라고 할 때, 표현주의는 '그로테스크한 표현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괴한'이라 번역될 수 있는 그녀의 '그로테스크'는 어쩌면 그녀를 비롯한 인간 집단 무의식의 충동적인 감각의 심층에 대한 직설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창조한 '파란사자인간'은 그 자체로 아예 충동적인 감각을 실재 공간에 해방시켜 놓은 직설인 것이다. 날아다닐 수 없는 타조의 기상천외한 푸른 깃털을 뒤덮고 있는 참을 수 없는 강렬한 동물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자의 몸을 가진 인간의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인간의 얼굴, '파란사자인간'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심층의 충동적인 감각을 직설적으로 조형해 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서고운의 초현실의 표현 방식은 오히려 황량한 묵시록적인 계시를 담은 살바드로 달리보다 막스 에른스트를 더 많이 닮아 있다 할 수 있다. 경계 위를 달림으로써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주의의 위력은 에른스트의 경우 인간과 동물적인 새의 결합으로 나타났었다. 하지만, 서고운의 필치는 에른스트처럼 정교하지 않다. 오히려 팝 아트적인 재빠르고 간략한 필치를 선호한다. 그런 점에서 서고운의 초현실주의는 극사실적인 묘사를 통한 이른바 초현실의 사실성의 강조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본래 그러하다는 식이다.

한국의 근현대미술사에서 초현실주의 정신에 입각한 본격적인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찾자면 민중미술 계열의 신학철이나 임옥상 혹은 안창홍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결코 충동적인 감각 자체와 결코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측면으로 도입한 정도에 그친다. 심층의 충동적인 감각 자체를 나름대로 체계적인 작업의 과정을 통해 이렇게 드러낸 것은 아마도 서고운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물론 서양의 초현실주의를 잘 알고 있는 관람객들은 '이게 왠 시대착오적인 것이냐.' 하고서 힐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 포스터가 지적하는 것처럼 초현실주의가 친숙한 것을 충분히 낯설게 하는 이른바 '언캐니 작업'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선구적인 작업을 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초현실주의는 나름의 시의적인(contemporary)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승인할 수 있다. 90년대 중반 서구에서 힘을 발휘한 루나 폰틱, 키키 스미스, 로버트 고버 등의 이른바 '애브젝트 미술'은 또 하나의 현대적인 초현실주의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서고운의 입체물 '파란사자인간'은 이들과 전통적인 초현실주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불의 괴물 작업과도 일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불의 작업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생경한 것과는 달리, 서고운의 작업은 다소 정제되어 있어 오히려 친숙함을 느끼게 한다.

위에서 분석한 것처럼, 서고운의 작업이 설립되는 지대는 일체의 지성적인 논리가 무효화되는 이중교차적인 키아즘의 충동적 감각의 영역이다. 어떤 방식으로건 이 영역을 이미 제대로 잡아채고 있는 작가는 얼마든지 새로운 예술 감각의 충격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강력한 작업을 선보일 것이다. 전시 주 제목인 '스핑크스의 눈물'이나 부제인 '경계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한 애도'에서 '눈물과 애도'는 사회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갇힌 충동적 감각의 몸 덩어리에 대한 것이리라. 그녀가 흘리는 눈물 방물의 표면에 신성한 관능이 예술 작업을 통해 마법처럼 비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충동적 감각의 세계로 전이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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